칼, 그리고 눈,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 - 알베르 까뮈, 『계엄령』 : 김재근
문재인 대통령의 행보에 많은 관심이 쏠린다. 과감한 인사와 함께 외교 정상화에 빠르게 힘쓰고 있는 모양새다. 국민들은 83%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화답하고 있고, 언론도 연신 칭찬일색이다. 마치 구원자의 손길이 닿은 것처럼 대한민국 전체가 새로운 정부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의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 우려란 당면과제로 떠오른 적폐청산과 협치를 통한 대통합의 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사회에 만연한 맹목성에 대한 경계를 바탕으로 한다. 하여, 정부는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 이 우려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을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무딘 칼, 날선 칼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두 가지의 당면 과제를 전제로 한다. 적폐청산과 협치를 통한 대통합이다. 이 과제들을 해결해야만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가능하다. 문재인 정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이 과제들은 선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적폐청산과 협치는 서로 충돌하고 있다. 이것은 문재인 정부가 출범 이래 맞닥뜨리게 될 첫 번째이자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개혁은 갈등과 분열을 동반한다. 하물며. 여소야대의 국회, 이미 정당간의 정쟁이 깊어진 국회에서 섣불리 개혁을 시도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적폐청산에 대해서는 더욱 민감하다. 적폐청산의 대상은 자연스럽게 지난 정부의 여당이었던 제1야당으로 좁혀진다. 제1야당을 적으로 돌리면서, 협치를 통한 국정운영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국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개혁을 칼을 꺼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며, 현 정부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내주고 무엇을 취할지 잘 가늠해야 한다. 협치란 어디까지나 ‘협의’다. 거래의 기술과 같다. 무작정 칼을 빼 들었다가는 향후 5년의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현명하지 못하고 무딘 칼날은 현 정부에게는 독이 될 공산이 크다. 개혁이 끝이 미완으로 끝날지 아닐지는 이 줄다리기 싸움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적폐청산의 대상을 신중하게 재검토해야한다. 대상을 명확히 한 후, 야당과 국민들이 동의할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무딘 칼이 될지, 현명하고 날선 칼이 될지는 신중함에 달렸다.
눈 감은 국민과 언론 향후 정부의 개혁에 있어서 신중한 개혁 시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태도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태도는 높은 지지율로 정부의 개혁을 옹호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의 행보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비판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혹자들은 이런 의문을 품을 수 있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비판이 필요하다는 말이 현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풍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행보는 물론 바람직하다. 막혀 있던 언로가 뚫렸고, 탕평적인 인사가 단행되었다. 비정상적으로 기능하던 국가의 체제를 이제야 비로소 정상의 범주에서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 초반의 행동에 심하게 매료된 듯하다. 사실 달라진 것은 없다. 어디까지나 ‘당연한 것’이 제자리를 찾았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의 새로운 정책들은 아직 시행되지 않았고, 지난겨울 우리를 광장으로 모여들게 만든 뿌리 깊은 사회의 관습과 제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는 앞으로 정부의 정책적 행보에 의해서 지금의 평가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의 우려가 발생하는 지점은 지금의 국민들의 지지가 맹목성을 띄게 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서다. 그 우려를 반증하는 대표적인 예시가 청문회 문자 폭탄 논란이다. 국민들이 청문회에 참석한 야당 의원들에게 일방적인 비방성, 협박성 문자를 보낸 것이다. 대부분의 문자들은 야당의원들을 이미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섣부른 판단과 행동들은 위험하다. 지지하는 정부에 대한 옹호는 좋지만, 어디까지나 정도를 지킨 옹호여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이 지지하는 이 정부의 정치적 행보에 브레이크를 거는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이미 그 증거로 이 논란을 두고, 야당은 연대를 이루어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협치를 내건 정부의 앞길에 뜻하지 않은 암초가 나타난 셈이다.
국민들의 객관적인 눈과 귀가 되어야 할 언론 역시 침묵하고 있다. 정부의 파격적인 인사와 행보, 청문회에는 비판적인 시선이 거의 사라졌다. 행여나 비판적인 글이 올라오면, 인터넷 누리꾼들의 사냥감이 되곤 한다. 기사에 대한 비난과 비방 그리고 이것은 더 나아가 한 개인의 기자와 소속 언론사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으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은 국민들의 눈치를 살피고 몸을 사리고 있다. 이미 비판성을 잃은 언론은 언론이 아닌 것이다. 눈을 감은 국민과 언론은 또 다른 사회적 폐단을 낳을 수 있다. 지난 정부가 그들만의 견고한 성을 쌓고, 한 지도자를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로 만들어 냈던 것처럼 우리는 또 다른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문재인이라는 개인의 성품이 뛰어나고, 소통을 중시하는 정부라고 할지라도 고인 물은 썩는다. 그렇기에 국민, 즉 우리의 눈은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칼, 그리고 눈 우리는 드디어 상식적인 정상의 국가를 되찾았다. 아직 모양새를 갖춰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앞길이 긍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더욱 신중해야 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칼, 항상 깨어있는 냉철한 눈은 우리가 지난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새로운 힘이 될 것이다. 알베르 까뮈는 희곡 『계엄령』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부야, 수많은 정권이 지나가지만 경찰은 남도다. 이 말은 어딘가 섬뜩하다. 또한 우리에게 경각심을 갖게 한다. 수많은 정권이 지나가도 우리를 옥죄던 사회의 관습과 제도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이상, 달라지는 것은 없다. 우리의 개혁은, 우리의 촛불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눈을 뜨고 새로운 칼로 저 ‘경찰’을 베어내자. 새로운 대한민국의 길은 바로 그것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