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는 남프랑스 아를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고,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품는다. 그렇게 고갱과 만나지만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크게 대립하여 그는 정신병원에 갇히고 멸시를 겪다 스스로 생레미 정신병원으로 간다.
남프랑스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더욱 강렬한 색채와 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
1888년, 고흐는 남프랑스의 밝은 태양에 감격하여 15개월 동안 200점이 넘는 작품을 쏟아내 주관적인 감정을 더욱 강렬한 색채와 임파스토 기법으로 표현한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꿈을 품은 그에게 고갱이 응답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늘 대립하고 성격 차이도 심했던 두 사람이었다. 고흐는 고갱의 충고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모독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귓볼을 자르기까지 했고, 고갱은 고흐를 떠난다.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작품에 몰두한 고흐
고갱이 떠나고 마을 사람들의 반발로 정신병원에 갇힌 고흐는 스스로 셍레미의 정신병원으로 향한다. 정신적 위기를 느낀 고흐는 현실과 격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열적으로 작품에 몰두한다. 자신의 영감이 직접적인 관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고흐는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린다. 흥분을 억제할수록 상상력이 더욱 넘쳐, 극적인 효과에 몰두되어 역동적인 형태와 힘찬 선에 바탕을 둔 특유의 소용돌이 아라베스크 무늬가 나타난다.
아를에서의 고흐는 그야말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고갱과 약 두 달간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그림에 대한 견해 차이로 사이가 악화되었다. 급기야 귓불까지 자르고 마는데, 마을 사람들이 고흐를 '빨간 머리의 정신병자'라며 반발하고 멸시하여 스스로 생레미의 정신병원으로 간다. 그 곳에서 현실과 격리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음으로 반복되는 발작 속에서 정열적으로 작품 제작에 몰두한다. 생레미 시절의 그의 그림을 보면 여성들과 원활하지 못했던 관계, 부모와의 소통 단절, 고갱과의 헤어짐 등으로 인해 타자세계에 겁을 내고 조화되지 못하는 자신을 비하하고 안타까워하는 고흐의 심리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