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작가, 빈센트 반 고흐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작가인 빈센트 반 고흐는 선명한 색채와 정서적인 감화로 20세기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정신병의 고통을 인상깊게 전달하고 있다. 그는 생존기간 동안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비로소 알려졌는데, 특히 그가 죽은 지 11년 후 파리에서 71점의 고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그의 명성은 급속도로 커졌다.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 남부지방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준데르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목사였던 만큼 종교적 활동과 미술을 추구했다. 어린 시절 고흐는 진지하고 내성적이었으며,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었다. 16살부터 고흐는 동생 테오와 함께 헤이그에 있는 화랑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테오와 고흐의 우애는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편지들은 고흐가 재능 있는 작가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고단한 삶에 대한 슬픔 또한 잘 보여준다. 점차 종교에 심취되고 신비주의에 빠져 일을 소홀히 한 고흐는, 1880년 27세의 나이에 동생 테오의 후원으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파리 몽마르트로 이주한 고흐는 인상파와 일본화풍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채와 격렬한 필치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작풍을 확립한다.
고흐는 파리 몽마르트 거리 한 화랑에서 일하고 있던 테오와 함께 살며 생활비도 줄이고 새로운 미술도 접하기 위해 파리로 온다. 그는 방 하나를 화실로 사용하며 창작활동에 전념했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그는 어두운 색조에서 좀 더 밝고 강한 색채로 변화를 가진다. 특히 당시에는 고흐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이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생활도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의 격정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은 주변 사람들과 늘 마찰을 가질 수 밖에 없게 했고, 동생 테오 마저 그와 함께하기 힘들어할 정도가 되었다. 결국 고흐는 자연을 그리워 하여 아를로 이사를 한다.
주관적인 감정을 담은 강렬한 색채, 임파스토 기법을 활용한 독자적인 화풍이 자리잡지만 스스로의 정신의 위기를 느낀 고흐는 셍레미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1888년 2월, 프랑스 남부 아를에 도착한 고흐는 여관 겸 식당인 '레스토랑 카렐'에서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아를에 예술 공동체를 만들기를 희망하였고, 노란 건물을 빌려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함께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 시기에 고갱을 맞이하며 그렸다는 해바라기 그림으로 유명하여 고흐를 '태양의 화가'라고도 한다. 아를에 온 고갱과 두 달간 작업하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지만, 둘의 의견 대립은 점차 심해져 사이가 급속히 나빠졌다. 급기야 귓볼을 잘라내기까지 하며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던 고흐는 생레미의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는 요양생활을 하면서도 왕성한 창작 활동을 벌여서 150점의 그림을 그렸다. 생레미에서의 1년은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의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킨 새로운 자연의 발견이자 그만의 색채회화가 완성되는 시기였다.
발작과 그림에 지쳐 쇠약해진 고흐는 파리 근교 오베르에 있는 의사 가셰에게로 간다. 그러나 가셰와 벌인 말다툼, 동생 테오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열등감 때문에 끝내 권총 자살을 택한다.
5월, 오베르에 도착한 고흐는 가셰박사를 만나 그의 소개로 동네의 식당에 딸린 여인숙에서 머물며 창작활동을 한다. 이 곳에서 동생 테오의 가족을 초대하여 식사도 하고, 아기를 안고 산책도 하며 행복한 인간적 인상을 남기가도 한다. 그러나 정신병으로 고통받던 고흐는 이곳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의 죽음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그는 동생 테오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다른 화가들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동생 테오 또한 다음 해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만다.